피안화 10

제 10화 : 재미와 공포

***** 부모 방까지 쭉 이어진 피를 따라갔다. 바닥에 떨어진 원 모양의 핏자국은 내 신발에 찍혀 발자국 모양으로 바뀌었다. 아아. 다음엔 어디를 찌를까. 여자애는 어떻게 피하려나. 들뜬 마음을 갖고 방 앞에 섰다. 분명히 부모 방의 문은 내가 열어놨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이 녀석 제법 하잖아? 소리 없이 문을 닫을 걸까 아니면 내가 소리치는 사이 닫은 걸까. 둘 중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 여자애한테는 목숨이 걸린 일이겠지만. 문을 잠글 시간적 여유는 없었나 보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손쉽게 문이 열렸다. 불이 꺼져서 방안은 어두웠다. 여자애가 죽음이란 공포를 맛보아서 그런지 방안은 조용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 하지..

제 9화 : 깨달음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지만 지금 거실은 폭탄이 떨어진 듯한 모양새일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가구 파편이 길을 막거나 내 다리를 긁어 상처를 냈다. 성냥에 불을 붙이고 싶었지만, 소금물 통을 들고 있어서 손이 부족했다. 오른손을 쓰려면 통을 가방에 넣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왼손만 멀쩡했었더라도…! 문을 뜯고 나온 여자 귀신이 제자리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짓에 물건들이 다시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앞, 뒤, 양옆, 머리 위쪽. 사방에서 물건들이 위협적으로 날아왔다. 날아오는 방향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벽 쪽으로 향했다. 맞기 바로 직전, 어둠 속에서 형태가 보일 때 간신히 피하는 정도였다. 역시 날아오는 것을 모조리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묵직한 물건이..

제 8화 : 도망

“거기 있었구나?” 여자 귀신의 섬뜩한 목소리. 다락방에서의 일이 아직도 화가 났는지 말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창문마다 배회하면서 나를 찾고 있었다는 소년 귀신의 말이 사실인 듯했다. 2층에서 베란다를 봤을 때를 제외하고는 창문을 본 적이 없었다. 다락방이 조용해진 이후부터 창문 밖에서 지켜보고 있었던 건가? 내가 창문에는 신경을 쓰지 않는다는 걸 알고서? 여자 귀신이 벽을 통과하며 집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고는 천천히 내가 있는 곳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붉은 두 눈은 단 한 번의 깜박임도 없이 나를 노려보고 있다. 귀신이라 형체가 없을 텐데도 여자 귀신이 한발 한발 내디딜 때마다 쿵쿵거리는 발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점점 가까워질수록 목선을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머릿속에서 빨간불이 켜졌다. 몸 ..

제 7화 : 어둠

던진 팥은 귀신의 화만 돋운 것 같았다. 잠깐 뒤를 돌아보자 나를 잡기 위해 빠르게 날아오는 여자 귀신의 모습이 보였다. 분노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마른침을 삼켰다. 잡히면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뒤쪽에서 용서 못 한다는 여자 귀신의 고함이 들렸다. 달리던 도중 손전등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꺼져버린다.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았지만 켜지지 않는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 새로운 배터리로 교체했다. 그 배터리로는 오늘 하루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뒤에 귀신이 따라오고 있다. 방향을 꺾어 왼쪽 대각선을 향해 달렸다. 벽을 따라가면 그 상자가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제 6화 : 발각

다락방에 다다르자 꺼두었던 손전등을 켜고는 주위를 살펴보았다. 텅 비어있으리라 생각했던 다락방에는 의외로 잡동사니들이 많았다. 대체 이런 고물들은 왜 모아두고 있는 걸까. 그래도 쌓여있는 물건들 뒤에 숨어있으면 여자 귀신에게 쉽게 발견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물건이 많은 만큼 거미줄이나 먼지도 많아 숨쉬기는 조금 힘들겠지만. 비가 와서 습기가 찼기 때문인지 매캐한 먼지 냄새와 함께 시큼한 곰팡냄새가 났다. 바로 위가 지붕이라 그런지 다락방은 집안 다른 곳과 달리 빗소리가 크게 들리는 듯했다. 내 발소리가 잘 안 들리는 건 다행이지만, 역으로 귀신이 다가오는 소리를 못 들을까 봐 걱정되었다. 빨리 찾고 다락방을 나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여기에도 꽃이 있는 거야?”“그건 나도 몰라. 내가 알고..

제 5화 : 의심

문 앞에서 고개를 빼꼼 내밀어 어두운 복도 끝을 바라보았다. 여자 귀신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조심한다고 나쁠 건 없으니까. 다가올 때 그 특유의 웃음소리가 없었다면, 난 이미 잡혔을지도 모른다. 번개가 한 번 치고 귀신이 없단 걸 확인한 후에, 복도로 나왔다. 방 바로 앞에 있는 베란다 쪽을 확인했다. 그 여자 귀신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복도는 뻥 뚫려 있어서 내가 있는 걸 바로 들켰을 것이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베란다로 향하는 창문을 열어보았지만 열리지 않았다. 만약 열렸다면 피안화든 뭐든 신경 쓰지 않고, 2층에서 뛰어내려 탈출했을 것이다. 죽는 것보다는 팔다리 한두 개쯤 부서지는 게 나을 테니까. 베란다 창문 너머로 집을 삼킬 듯 쏟아지는 폭우가 보인다. 베란다 중앙에 서 있는 흐릿한 무언가..

제 4화 : 숨바꼭질

피안화라는 꽃의 줄기를 잡고 힘껏 잡아당겼다. 생각과는 달리 꽃의 줄기는 쉽게 뜯겼다. 역시 평범한 꽃이 아니었던 듯 내 손에 있던 그것은 불이 붙은 것처럼 갑자기 화륵하고 타올랐다. 뜨겁지는 않았지만, 깜짝 놀라 그 꽃을 바닥에 내던졌다. 내 손에서 떨어진 꽃은 몇 초간 타오르다 붉은 입자로 분해되었다. 불에 타느라 생긴 듯한 연기와 분해된 입자가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이제 되었냐며 소년 귀신을 향해 돌아본 순간이었다. “…나는, …다.” 한 남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렸다. 소년 귀신의 목소리가 아닌, 성인 남자의 목소리였다. 지금까지 창문을 두들기던 빗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아니, 빗줄기가 정지해있었다. 나를 제외한 주변의 모든 시간이 멈춘 거였다. 눈앞이 순식간에 어떤 사람이 보고 있는 장면으..

제 3화 : 소년 귀신과 피안화

서로 붙어있는 이 두 방은 그 남매의 방인 것 같았다. 이 집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지만, 뭔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방안은 빗소리를 제외하고는 그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고요했다.  아무도 없는 것 같아 문고리를 잡으려고 했다. 문고리가 있을 부분에 손을 가져갔다. 하지만 내 손은 허공에서 맴돌 뿐이었다. 이상해서 확인해보자 손잡이가 있어야 할 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오래되어서 부서진 건가? 아까 그 방은 멀쩡한 것 같았는데. 생각을 잠시 접어두고 손가락으로 문을 조심스레 밀었다. 문은 힘없이 열렸다.  생각보다 쉽게 열려 잠깐 멈칫했다. 설마 안에 귀신같은 게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조심스레 방안으로 한 발을 넣었다. 한 발을 내디딘 그 순간이었다. 때마침 번개가 치면서 방안이..

제 2화 : 처녀귀신

문을 열고 들어간 건물의 내부는 말끔했던 건물 외부하고는 조금 달랐다. 방치된 지 오랜 시간이 지났음을 증명하듯 발자국 없이 뿌옇게 쌓여있었고, 모서리나 가구 군데군데에는 거미줄이 자리하고 있었다.  전해져 오는 살해당한 남매 이야기가 사실인 듯, 먼지로 인해 매캐한 냄새 사이로 비릿한 피 냄새가 났다.  외관과는 달리 생각보다 넓은 내부에 감탄했다. 나는 현관의 문을 열어 둔 채로 손전등 불빛을 이리저리 움직여 집안의 구조를 살펴보았다. 현관의 바로 앞은 거실인 듯 소파와 테이블이 놓여있었다.  현관 바로 앞에 가족사진처럼 보이는 액자가 깨져있었다. 사진이 오래되어 얼굴은 알아볼 수 없었지만 아마 소문 속의 그 남매와 부모의 사진일 것이다. 그 액자를 발견한 뒤, 나는 무언가에 이끌리듯 집안으로 깊숙이..

제 1화 : 숲속의 흉가

“하루야, 절대 숲속에 있는 흉가에는 가지 마라.”  돌아가신 어머니로부터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은 말이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귀신이라던가 미신 등에 관심이 많았다. 방안에 각종 자료를 쌓아놓고 있었을 정도였다. 그런 나의 모습이 어머니께서는 달갑지 않으셨는지 종종 내 자료들을 버리곤 하셨다. 특히, 그 흉가에 대한 자료라면 불에 태워 없애버리기까지 하셨다.  숲속의 흉가에 가지 말라는 이유는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연달아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100년 전 그 집에 살던 어린 남매 둘이 살인마에게 살해당했다고 한다. 그중 여동생의 경우, 현관 바로 앞에서 수십 차례 칼에 찔린 채로 죽어있었고 집 안 여기저기에서 그녀의 유혈이 발견되었단다. 그 남매의 부모님은 오래전 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