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속에서 핀 피안화/소설

제 9화 : 깨달음

밤꿈 (Night Dream) 2025. 4. 9. 20:00

어두워서 잘은 안 보이지만 지금 거실은 폭탄이 떨어진 듯한 모양새일 것이다. 움직일 때마다 가구 파편이 길을 막거나 내 다리를 긁어 상처를 냈다.

 

성냥에 불을 붙이고 싶었지만, 소금물 통을 들고 있어서 손이 부족했다. 오른손을 쓰려면 통을 가방에 넣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무의식중에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왼손만 멀쩡했었더라도…!

 

문을 뜯고 나온 여자 귀신이 제자리에 서서 손을 움직였다. 그녀의 손짓에 물건들이 다시 날아다니기 시작한다. 앞, 뒤, 양옆, 머리 위쪽. 사방에서 물건들이 위협적으로 날아왔다. 날아오는 방향을 조금이나마 줄이기 위해 벽 쪽으로 향했다. 맞기 바로 직전, 어둠 속에서 형태가 보일 때 간신히 피하는 정도였다.

 

역시 날아오는 것을 모조리 피하는 것은 무리였다. 묵직한 물건이 날아와 내 뒤통수를 가격했다.

 

“윽…!”

 

현기증으로 휘청거렸다.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몸은 얼마 못 가 바닥에 주저앉았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코피가 흘러내렸다. 여자 귀신은 그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내가 쓰러진 곳을 향해 물건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옆으로 굴러서 몇 개는 피했지만, 거실에 놓여있었던 거대한 장식장이 쓰러지면서 오른쪽 발이 깔렸다. 너무 아파서 비명조차 나오지 않았다. 극심한 고통에 기절하려는 것을,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어서 막았다. 깔린 발의 감각이 점차 사라져간다. 발이 깔려서 움직이지 못한다. 하지만 이대로 오래 있으면 분명 죽는다.

 

인간은 죽을 위기에 처하면 평소의 몇 배나 되는 강한 힘을 발휘한다고 하던가. 평소라면 움직이지도 못했을 장식장이었다. 그것을 힘으로 밀어서 치운 뒤, 깔린 발을 빼냈다. 도망쳐야 한다. 아직 쓸 수 있는 팔과 다리로 바닥을 기어서 그 자리를 피했다.

 

자리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바로 위에서 테이블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다. 판단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바로 죽었을 것이다. 눈앞에서 죽음이라는 공포와 마주하자 오금이 저렸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이 상황을 벗어나지? 뭐라도 없는 건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서서히 주변이 보이기 시작해서, 앞에 어떤 물건이 있는지 얼추 알아볼 정도였다. 부서진 가구 파편들이 뾰쪽하게 날을 세운 채 여기저기 놓여있었다.

 

나한테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 이런 난장판에도 멀쩡히 서 있는 가구가 딱 하나 보였다. 위화감이 들었다. 설마….

 

남아있는 힘을 긁어모아 그곳을 목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바닥에 있는 유리 조각에 여기저기 긁혀 피가 났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았다.

 

내 행동에 여자 귀신도 무엇인가 눈치챈 듯 물건을 막 던지기 시작한다. 조금 전까지 마구 던져진 물건들은 작게 부서져 위력이 조금 줄어들어 있었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나는 힘겹게 가구 앞까지 도착했다. 구세주처럼 나타난 그 가구에는 부적이 여기저기 붙어있었다. 만졌을 때 재가 되지 않는 걸 봐선 한 번도 사용되지 않았던 부적이다. 무슨 가구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살기 위해 그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부적의 효과가 나타났는지 여자 귀신이 발악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나오라고!!”

 

방금 들어온 가구 밖으로 물건들이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내가 사라진 방향으로 거실에 있던 모든 가구를 던지는 듯했다. 평범한 가구라면 부서졌겠지만, 부적에 방어 효과가 있는지 이 가구는 크게 흔들리기만 할 뿐 멀쩡했다.

 

여기라면 괜찮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안심하고 있을 때였다.

 

얼굴 바로 옆으로 칼날이 튀어나와 왼쪽 볼을 스쳐 지나갔다. 나는 그 즉시 가구 문에서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칼에 긁힌 상처에서 피가 나왔다. 주방에 있던 칼을 던진 건가. 칼날이 조금 더 위에서 튀어나왔다면 왼쪽 눈을 잃을 뻔했다. 이제 끝난 건가? 라고 생각하자마자 칼날 4개가 더 튀어나왔다.

 

가구에 꽂혀있던 칼날 하나가 빠져나가더니 다시 들어온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칼날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반복한다. 분명히 이 가구가 안 보일 텐데 어떻게…. 공황상태에 빠져 주위를 한번 훑어본 뒤에야, 나머지 4개의 칼이 가구 여기저기 꽂혀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여자 귀신은 허공에 칼이 꽂혀있는 곳을 향해 집중적으로 찌르는 거였다.

 

가구 밖의 상황에 심장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졌다. 그에 대응하듯 지혈되지 못한 상처에서 흘러나오는 피의 양이 많아졌다. 내 몸에서 나온 피는 가구의 바닥을 적시기 시작했다. 과다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아까 머리를 부딪친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서서히 눈이 감기기 시작했다. 아직 밖에 여자 귀신이 있는데…. 의식을 잃으면 안 되는데….

 

입술을 깨물면서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지만 무리였다.

 

 

 

전에 봤던 새카만 공간. 그 가운데서 바닥에 주저앉아 울고 있는 소녀가 보였다.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어디선가 본 것 같은데, 대체 어디서 봤더라. 무엇인가 떠오르려다가 갑작스러운 두통에 사라져 버렸다.

 

소녀를 향해 조금씩 가까이 다가가자 울음을 그친다. 소녀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본다. 눈에서는 투명한 눈물이 아니라 새빨간 피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소녀가 노려보자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나는 흠칫하고 놀라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 순간 소녀의 목이 이상하게 비틀리기 시작했다. 새카맣던 공간이 핏빛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여자애가 입을 열었다.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들렸다.

 

“…왜 그랬어?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도대체 나한테 왜 그러는 건데?!”

 

소녀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눈 깜짝할 사이 내 앞으로 다가왔다. 순식간이었다.

 

“네가 그랬잖아.”

 

목소리에는 살기가 가득 담겨있었다. 소녀는 두 손으로 내 목을 잡고는 힘을 주어 꽉 눌렀다.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내 시야가 90도로 돌아갔다.

 

 

 

눈이 번쩍 뜨였다. 서둘러 목을 만져보았다. 다행히 멀쩡했다.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그건 꿈이었나…. 식은땀을 흘렸는지 옷이 축축하게 젖어있었다. 꽤 오랫동안 의식을 잃은 듯했다.

 

의식을 잃기 전까지만 해도 소란스러웠던 가구 밖이 조용했다. 숨을 죽이고 귀를 기울였다. 그저 세차게 쏟아지는 빗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 여자 귀신은 간 건가? 가구에 박혀있던 칼 4개는 그대로 있었지만, 여자 귀신이 휘두르던 칼 하나가 안 보였다. 나는 마른 침을 삼켰다. 분명 여자 귀신이 갖고 간 것이다. 이제부터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해야겠다.

 

가구가 부서진 틈으로 밖을 살펴보았다.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움직인다는 느낌은 없었다. 진짜 간 건가? 내가 숨은 위치를 알고도? 문을 열려다 여자 귀신의 수법을 생각하고는 손을 뗐다. 속임수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여기에 계속 있어도 되는 건가. 얼마 동안 의식을 잃었는지 모른다. 가구에 붙어있는 부적의 지속시간도 모른다. 하지만 아까 오른쪽 발을 다쳐서 제대로 달릴 수도 없다. 나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다.

 

여기 계속 있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었기에 가구 밖으로 나가기로 했다. 이제 소금물은 별로 효과가 없을 것 같아 가방에 넣고는 성냥갑을 쥐었다.

 

몇 번 심호흡하고는 문을 열었다. 다행히도 밖에는 귀신이 없었다. 근처에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성냥갑을 입에 물고는 오른손에 성냥 한 개비를 들어 불을 붙였다. 그제야 주위를 자세히 볼 수 있었다. 집안은 난장판이 된 상태였다. 내가 숨어있던 가구를 제외하고 전부 부서진 듯했다.

 

여자 귀신이 어디 숨어있나 싶어 꼼꼼히 살펴보았다. 창문 밖도 잊지 않고 확인했다. 어디론가 가버린 듯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난리를 쳐놓고 무슨 꿍꿍이지?

 

어떻게든 걸어보려고 오른쪽 발에 힘을 주었다. 발바닥이 땅에 닿자마자 극심한 고통이 몰려왔다. 체감상 뼈가 으스러진 듯했다. 그 커다란 것에 깔렸으니 멀쩡할 리가 없겠지. 하는 수 없이 가구 파편 중에 기다란 막대기 같은 것을 집었다. 아마 주방 식탁의 다리 부분일 것이다. 이 막대기를 목발 대신 사용하기로 했다. 기어가도 되지만 그러면 안 될 것 같았다. 절뚝거리며 계단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지하실로 향하는 계단을 한 발짝씩 천천히 내려갔다. 계단 끝에 거의 다 도착할 때쯤 차가운 물이 발에 닿았다. 밖에 비가 와서 그런지 지하실 바닥에는 물이 얕게 차 있었다. 걸을 때마다 물을 밟아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이러다 들키는 것이 아닐까 걱정되긴 했지만, 남은 피안화는 여기 있을 것 같았다. 그런 느낌이 들었다.

 

소년 귀신이 나를 증오하고 있다는 여자 귀신의 말이 떠올랐다. 이제는 소년 귀신이 했던 말을 믿어도 되는지 모르겠다. 피안화를 다 찾으면 나갈 수 있는 건지, 저주를 풀 때 나를 제물로 쓰는 것은 아닌지. 그가 했던 모든 말이 의심스러웠다.

 

물론 여자 귀신의 말을 그대로 믿으면 안 되겠지만, 지금까지 소년 귀신하고 있었던 일을 떠올리면 신빙성은 있었다. 소년 귀신은 나를 걱정해 줄 때도 있었지만, 은근히 내가 죽기를 바란 적도 있었다. 전에 적인지 아군인지 물어봤을 때 뜸을 들인 것도 그렇고.

 

…생각해보니 그 소년 귀신은 지금까지 나를 ‘너’라고 호칭해서 부른 적이 없다. 어째서? 그리고 지금은 왜 안 나타나는 거야?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모르겠다.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 생각이 복잡해지자 머리가 아파 왔다.

 

소년 귀신이 분명 집 안에 있는 피안화는 총 7송이라고 했다. 일단 마지막 하나만 남기고 다 꺾어보기로 했다. 마지막 피안화는 내 안전이 보장되었을 때 꺾자. 만약 피안화를 다 꺾어도 탈출을 못 한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지?

 

그래. 그때는 이 집을 태워버리자. 지금은 비가 오고 있으니 산불은 걱정하지 않아도 돼. 화상은 조금 입겠지만 이 집에서 탈출할 수는 있겠지.

 

짧아지는 성냥에 엄지와 검지가 점점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나는 들고 있던 성냥불을 끄고 거의 다 타서 재가 된 성냥을 바닥에 버렸다, 그러고는 새로운 성냥을 꺼내 불을 붙이고 주변을 살폈다. 지하실은 1, 2층에 비해 훨씬 어두웠다. 계단 근처에 딱 하나 있는 창문에서 외부로부터의 빛이 간신히 들어오고 있었다. 지하실의 크기는 다락방하고 비슷한 정도였다. 내 생각대로 젖어서 뭉개진 종이상자를 제외하고는 위협이 될 만한 물건은 없었다.

 

지하실 바닥에 고인 물이 상처에 닿자 쓰라림에 반사적으로 표정이 구겨진다. 벽에 곰팡이가 피었는지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난다. 그사이에 섞여 있는 비릿한 냄새. …피 냄새인가? 기분 나쁜 곳이다. 피안화만 찾고 서둘러 나가야지. 나는 아픈 몸을 이끌고 앞으로 나아갔다.

 

다락방에서처럼 코너를 기준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어느 쪽부터 갈까 하는 고민도 잠시. 직감적으로 오른쪽 길이라고 생각했다. 오른쪽으로 몇 발짝 걸어가자 정답이었는지 저 멀리 붉은 빛이 보였다. 나는 그 빛을 향해 걸어갔다.

 

이 방이 보일러실인지는 모르겠지만 각종 커다란 기계들이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기계는 빗물에 계속 잠겨있던 것인지 아래쪽이 녹슬어있었다. 비릿한 냄새는 이 기계의 녹 냄새인가.

 

그 한가운데 피안화가 보인다. 1층에서 봤던 이전의 피안화보다 더 붉게 빛나는 것처럼 보였다. 기분 탓인지, 지하실이 어두워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다. 피안화의 붉은 빛에 바닥의 물이 피처럼 보였다. 이 피안화를 꺾으면 살인마가 여자애를 죽이는 장면이 보일 것이다.

 

네 번째 피안화를 꺾은 뒤로 이명은 심해지고 환청까지 들리기 시작했다. 꿈에서 본 소녀의 원망하는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죽을 위기에 처하니 미쳐버린 건가. 고개를 좌우로 세게 흔들어 환청을 없애보려고 했지만, 효과가 없었다.

 

환청 소리를 무시하고 피안화를 꺾으려고 손을 뻗었다. 그 순간 소녀의 목소리가 바로 귀 옆에서 들렸다. 화들짝 놀라 주위를 둘러보았다. 아무것도 없었다. 환청이 그렇게까지 생생하게 들린다고…? 어디서 들어본 익숙한 목소리. 분명 알고 있는 목소리인데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 환청이 조금씩 잦아들 때쯤, 살기가 담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아직도 누구인지 모르겠어?”

 

살기가 담긴 그 목소리가 내 정신을 일깨운 듯 누구인지 바로 생각났다. 바보 같았다. 왜 바로 몰랐던 걸까. 지금까지 계속 봤었는데. 이제 또 보게 될 소녀인데.

 

나는 심호흡을 몇 번 한 뒤, 마음을 굳게 먹고는 다섯 번째 피안화를 꺾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