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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방까지 쭉 이어진 피를 따라갔다. 바닥에 떨어진 원 모양의 핏자국은 내 신발에 찍혀 발자국 모양으로 바뀌었다.
아아. 다음엔 어디를 찌를까. 여자애는 어떻게 피하려나. 들뜬 마음을 갖고 방 앞에 섰다.
분명히 부모 방의 문은 내가 열어놨었다. 하지만 지금 내 눈앞에는 굳게 닫힌 방문이 보였다. 이 녀석 제법 하잖아? 소리 없이 문을 닫을 걸까 아니면 내가 소리치는 사이 닫은 걸까. 둘 중 아무래도 좋았다. 마치 숨바꼭질을 하는 느낌이었다. 그 여자애한테는 목숨이 걸린 일이겠지만.
문을 잠글 시간적 여유는 없었나 보다. 문고리를 잡고 돌리자 손쉽게 문이 열렸다.
불이 꺼져서 방안은 어두웠다. 여자애가 죽음이란 공포를 맛보아서 그런지 방안은 조용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그냥 넘어갔겠지. 하지만 나에게는 수많은 사람들을 죽인 경험이 있다. 방 안에 숨어있는 목격자를 찾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귀를 기울이자 인기척이 들린다. 이 방 어디선가 들려오는 여자애의 미세한 숨소리. …가구 안에 숨은 건가.
방안의 불을 전부 켰다. 불이 들어오자 가구들의 배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내 바로 오른쪽에 커다란 옷장 하나가 보였다. 여자애는 옷장 안이다. 성큼성큼 옷장 앞으로 다가가서 문을 열어 재꼈다. 정답이다. 여자애는 쭈그려 앉아서 벌벌 떨고 있다가 문이 열리자 소스라치게 놀란다. 자신의 위치가 이렇게 빨리 발각될 줄은 몰랐겠지.
“숨을 쉬면 안 되지.”
여자애가 살려달라고 울면서 빌기 시작했다.
살려줄 리가 없잖아. 나는 칼을 들어 여자애의 배를 찔렀다. 칼을 뽑자 상처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린다. 피는 옷장 바닥에 고이고 있었다. 여자애는 고통스러운지 비명도 못 내고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자. 이제 또 도망가 봐.”
여자애는 손으로 상처를 부여잡은 채 움직이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잖아? 이러면 재미가 없어지는데. 그러다 문득 좋은 생각이 났다.
“그럼 이렇게 하지. 지금부터 5번의 기회를 주겠어. 4시간 동안 내가 한 번이라도 너를 못 찾으면 살려서 보내줄게.”
“지… 진짜요…?”
“대신 5번 다 걸리면 너는 내 손에 죽는 거야.”
말이 끝나기 무섭게 여자애가 휘청거리며 방 밖으로 도망쳤다. 역시 생각이 짧아. 난 살려줄 생각이 없는데 말이지.
도망갈 틈을 주는 동안 부모 방 창문의 잠금장치를 망가뜨렸다. 이것으로 이 집에서 탈출한 곳은 그 어디에도 없다.
다음엔 어디를 찔러볼까. 급소를 찌르면 아까 남자애처럼 금방 죽어버리겠지? 어디를 찌를지 즐거운 고민하면서 복도로 나왔다.
아까보다 더 많은 피가 복도에 떨어져 있었다. 5번 더 찌르기도 전에 과다출혈로 죽는 게 아닐까 조금은 걱정되었다. 바닥에 떨어진 피는 방에서부터 계단으로 이어져 있었다. 다음은 어디로 갔을까. 계단 위로 갔을까 아래로 갔을까. 일부러 핏자국을 밟아가면서 계단 쪽으로 향했다. 아. 위로 갔네. 분명 위쪽은 다락방이었지?
계단을 천천히 올라갔다. 계단 끝에 다다르자 다락방이 보인다. 밝게 뜬 보름달이 다락방을 환히 비춰주어 주위를 살펴볼 수 있었다. 많다는 재산을 고물에 쏟아부었던 건지 다락방에는 잡동사니가 가득 쌓여있었다. 이걸 믿고 여기로 온 거구나? 숨을 공간이 많을 테니까.
계단까지 있었던 핏자국이 더이상 보이지 않았다. 아까 손으로 상처 부위를 틀어막더니 그게 지혈을 하는 중이었나 보다. 천을 감아서 마저 지혈한 건가. …하는 수 없지. 직접 돌아다니며 찾는 수밖에.
저 앞에 코너가 보였다. 오른쪽 길과 왼쪽 길. 어디로 갔을지 고민하다가 오른쪽 멀리 커다란 상자를 발견했다. 상자가 있는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상자 안에서 미세한 숨소리가 들렸다. 여자애가 더 겁을 먹도록 상자를 걷어찼다. 무게감이 느껴진다. 몇 번 더 걷어차고는 상자의 뚜껑을 천천히 열었다.
“…뭐야.”
상자 안에는 여자애가 없었다. 대신 정체 모를 쇳덩이가 있었다. 숨소리는 내 착각이었다고? 내가 틀렸다는 사실에 화가나 이를 갈았다. 이 쇳덩이가 사람을 헷갈리게 하고 있어!
나는 묵직한 쇳덩이를 상자에서 꺼내 바닥에 집어 던졌다. 쇳덩이가 바닥에 닿자 쿵 소리가 집안에 울린다. 아직도 분이 안 풀려 씩씩거렸다. 설마 이 틈에 도망간 건 아니겠지.
서둘러 왼쪽 길로 달려갔다. 도망갔다면 집안을 다 뒤져야 하니 골치 아프다. 아니, 발소리가 들리지 않았으니 아직 여기 있을 거다. 그래야만 한다.
왼쪽 길로 가는데 잡동사니들이 나를 못 가게 하려는 듯 앞길을 막는다. 마치 살아서 움직이는 것 같았다.
방해하지 마라. 앞에 보이는 물건마다 손으로 밀쳐 넘어뜨렸다. 바닥에서 걸리적거리는 것은 발로 차 버렸다. 그중에는 항아리도 있는지 도자기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저 멀리 가구가 쌓여있는 곳이 보였다. 이번엔 분명 저 안에 있으리라. 주변의 가구들을 밟고서 그 위로 올라갔다. 이번에는 정답이다. 가구들 안쪽,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쭈그려 앉아있는 여자애가 보였다. 역시 내 예상대로 지혈한 건지 허리에는 천이 감겨있었다.
“찾아버렸네?”
여자애가 소리가 들린 쪽을 바라보고는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다. 나는 칼을 들어 아래쪽에 앉아있는 여자애한테로 던졌다. 노리는 것은 아킬레스건이었다.
던진 칼은 도망가려던 여자애의 발목을 스치고는 바닥에 꽂힌다. 쳇. 아슬하게 빗나갔나.
여자애는 고통에 잠시 주저앉는다. 발목에서 흘러내린 피가 나무로 된 바닥에 스며든다. 부르르 떨던 여자애의 몸이 잠잠해진다. 자세히 보니 입술을 꾹 깨물고 있었다. 고통을 참고 있는 건가. 여자애는 가구 사이로 빠져나가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딜 도망가려고. 여자애를 쫓아가기 위해 가구에서 바로 뛰어내리려 했다. 모서리 부분을 밟자 가구가 중심을 잃고 쓰러진다. 간신히 가구에 깔리는 것은 면했지만 칼이 저 무너진 가구 아래 있다. 가구 사이로 틈새가 있었지만 내가 들어가기엔 무리였다.
주방에서 하나 가져와야 할 것 같았다. 어차피 여자애는 이미 도망갔고 집안 어디에 숨어있겠지. 나는 여자애 쫓는 것을 잠시 멈추고는 아까 봤던 주방으로 향했다.
1층에 있는 주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계단 위로 새로운 핏자국이 보인다. 지혈을 못 한 듯했다. 하긴…. 상황이 급박했으니 도망치기 바빴겠지. 핏자국은 주방으로 향하는 코너에서 끊겨있었다. 주방 쪽으로 간 건가. 수색 범위가 줄어들었으니 나한테는 잘된 일이다. 칼을 얻은 다음에 바로 찾으러 가야지.
주방에는 생각보다 칼이 많았다. 이건 뭐 칼 장사하는 것도 아니고. 칼을 들고는 날을 살펴보았다. 관리를 잘한 듯 전부 다 날이 서 있었다. 많은 칼 중에 제일 날카로운 것을 들었다. 이거라면 깔끔하게 벨 수 있을 것이다. 이번엔 제대로 아킬레스건을 그어야지.
거실 쪽으로 향하는 길에 문이 두 개 있길래 그 중 오른쪽 문을 살짝 열어봤다. 세탁실로 쓰이는 곳 같았다. 저 멀리 있는 큰 대야 안에 물에 젖은 옷들이 쌓여있었다. 그 옆에 놓은 병으로 문 뒤쪽이 비친다. 문 뒤에 쥐죽은 듯이 숨어있는 여자애가 보였다. 바로 정답이냐.
“이러면 재미가 없잖아.”
방 안으로 들어가 문 뒤에 있는 여자애를 잡으려고 했다. 그 순간 여자애가 문 뒤에서 뛰어나와 무엇인가로 내 뒤통수를 내리쳤다.
갑작스러운 충격에 몸이 휘청거렸다. 흐릿해지는 시야로 방금 내리친 것이 무엇인가 확인했다. 뭐야. 빨래판? 어째 없다 했더니 저 녀석이 들고 있었던 건가? 충격으로 고막이 파열되었는지 이명이 들렸다.
내가 몸을 잘 가누지 못하는 걸 본 여자애가 도망치려고 한다. 어딜 도망가려고.
문밖으로 나가려던 여자애의 왼쪽 손목을 잡고는 방 안으로 집어 던졌다. 세게 집어던졌는지 손목이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뼈가 부러지는 고통과 바닥에 부딪히는 충격에 여자애가 비명을 질렀다.
놓칠뻔한 칼을 고쳐 쥐고 부들거리며 덜고 있는 여자애한테로 다가갔다.
후드득―.
뒤늦게 코피가 흘러내린다. 손가락으로 코 아래쪽을 한 번 닦고는 손에 묻은 내 피를 봤다. 그러고는 미친 듯이 웃었다. 역시 이 녀석은 재미있어.
“반격할 줄은 몰랐는데 말이야. 각오는 되어있겠지?”
도망치려는 여자애의 오른쪽 발을 잡고는 새로 구한 칼로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여자애의 비명이 더 커졌다. 극심한 고통에 여자애가 발작하듯이 몸을 심하게 떨었다.
빨래 대야 안에 있는 옷 하나를 꺼내 여자애한테 던져주었다.
“지혈하고 도망가도 좋아. 어차피 이제 멀리는 못 도망갈 테니까.”
여자애는 출혈이라도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천을 잡는다. 천으로 베인 발목을 칭칭 감고는 질끈 묶는다.
“자. 이제 남은 기회는 3번이야. 열심히 도망가 봐.”
“…제발 살려주세요.”
“그건 안 되지. 지금 난 너한테 기회를 준 거라고. 내 손에서 저항도 못하고 단칼에 죽어 나간 인간들이 몇 명일 거라고 생각해? 왜. 지금 그냥 죽여줄까? 고통스럽게 죽일 텐데?”
그제야 여자애가 비틀거리며 일어나 도망치기 시작했다. 오른발 때문에 기어가는 거나 다름없었지만.
그래. 그래야지. 이제는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찾아볼까나. 방 밖으로 나가려다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이명이 심해졌다. 머릿속에서 죽은 남자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나한테 저주를 퍼붓는 말. 죽은 놈이 말할 리가 없잖아.
환청까지 들리다니. 아까 여자애한테 맞아서 몸 상태가 나빠진 건가. 아아. 조금 쉬다 움직여야겠다.
여자애는 분명 지하실로 갔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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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를 보고 나서 확신할 수 있었다. 꿈에서 본 소녀는 분명 소년 귀신의 여동생이다. 어째서 나를 죽이려고 했던 걸까. 여자 귀신하고 비슷한 처지인 건가? 아니, 그러기에는 나 때문이라고 말한 게 설명되지 않는다. 왜 현실에서 안 나타나고 꿈에서만 나타나는 거지?
피안화로 오래전에 끝난 과거의 일을 나한테 보여주는 건 무엇을 뜻하는 걸까. 이미 지나가 버린 과거는 다시 되돌릴 수 없는데.
상황이 진행되면 진행될수록 의문점만 걷잡을 수 없이 계속 생겨났다. 골치가 아팠다. 아직 앞선 의문점에 대한 답도 찾지 못했는데…. 해결되지 않는 답답함에 오른손으로 머리만 막 긁어댔다.
집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러다 여기에 매몰되어서 죽는 거 아닐까. 그런 걱정을 했다. 나는 지하실을 나가려고 계단 쪽으로 향했다. 위층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도착했지만 1층으로 갈 수는 없었다.
계단 위쪽에서 여자 귀신의 발끝이 보였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