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 속에서 핀 피안화/소설

제 7화 : 어둠

밤꿈 (Night Dream) 2025. 3. 26. 20:00

던진 팥은 귀신의 화만 돋운 것 같았다. 잠깐 뒤를 돌아보자 나를 잡기 위해 빠르게 날아오는 여자 귀신의 모습이 보였다. 분노한 그녀의 얼굴이 눈에 들어오자 마른침을 삼켰다. 잡히면 곱게 죽진 못할 것이다.

 

아니, 죽고 싶지 않아. 그렇게 생각하자 다리가 빠르게 움직였다. 뒤쪽에서 용서 못 한다는 여자 귀신의 고함이 들렸다.

 

달리던 도중 손전등이 몇 번 깜빡거리더니 꺼져버린다. 전원 버튼을 여러 번 눌러보았지만 켜지지 않는다. 분명 집에서 나올 때 새로운 배터리로 교체했다. 그 배터리로는 오늘 하루 동안은 충분히 쓸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 여기서 멈출 수는 없다. 뒤에 귀신이 따라오고 있다. 방향을 꺾어 왼쪽 대각선을 향해 달렸다. 벽을 따라가면 그 상자가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무작정 달렸다. 아까 봤던 항아리 파편에 긁힌 듯 발바닥과 발목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가구에 여기저기 부딪혀 온몸이 아파 왔다. 그렇게 달리다 앞을 가로막는 딱딱한 무언가에 머리를 박았다. 고통을 느끼기도 잠시. 내 앞에 있는 것이 벽임을 깨달았다. 한 손으로 벽을 짚어 앞으로 나아갔다.

 

눈이 어둠에 적응하고 있는 듯 주변이 미세하게 보이기 시작한다. 앞쪽에 커다란 무언가가 있는 것 같았다. 부적이 붙어있는 그 상자다.

 

나는 남아있는 모든 힘을 다해 뛰었다. 중간에 쇳덩이에 발이 걸려 상자를 코앞에 두고 쿠당탕 굴렀다. 잡동사니들 위로 굴러 온몸이 욱신거렸다. 하지만 아파할 시간도 없었다. 서둘러 상자 안으로 들어가 숨을 죽였다. 제발 부적이 효과가 있기를….

 

들어간 지 몇 초도 되지 않아 분노에 찬 여자 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상자. 여기 있던 상자 어디 갔어! 분명 상자 안으로 들어가는 걸 봤는데!!”

 

아. 들어가는 걸 들켰구나. 다른 가구에 숨었다면 죽은 목숨이었을 것이다. 아까 부적이 붙은 이 상자를 봐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여자 귀신은 상자가 보이지 않는 듯 소리를 질러댄다. 여자 귀신 특유의 쇳소리에 오른쪽 고막이 찢어진 듯 이명이 들린다. 귀신의 목소리와 이명이 겹쳐 머리가 울린다. 고통스러웠다. 제발 빨리 가라…!

 

쿵-!

 

무언가 거대한 게 떨어진 소리가 나며 상자가 흔들린다. 묵직한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였다. 천둥소리는 아니다. 뭐야. 방금 그 여자 귀신이 물건을 던진 거야? 말로만 듣던 폴터가이스트…? 뒤이어 비슷한 소리가 두세 번 더 들린다. 그러다 집안은 잠잠해졌고 빗소리만이 들렸다.

 

이 상자 뚜껑을 열면 부적의 효력은 사라질 것이다. 옷장 안에 있을 때처럼 속임수일 까봐 상자 안에 가만히 있었다. 갑자기 소리가 안 들리니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밖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지 모르겠다. 세차게 내리는 빗소리와 이따금 치는 천둥소리에 더 무서워졌다.

 

나는 아래층에 내려갔던 소년 귀신이 빨리 돌아오길 간절히 빌었다. 집안을 구석구석 뒤지고 있나 왜 오랫동안 안 오는 거야. 오랫동안 방치된 상자에서 곰팡이가 피었는지 바로 코앞에서 나는 곰팡냄새에 숨을 쉬기 어려웠다.

 

 

 

새카만 공간. 내 앞에 소녀 한 명이 서 있었다. 어린 여자아이였다. 어디서 봤던 것 같은데 기억이 나질 않았다. 시선을 이리저리 움직이다 소녀와 눈이 마주쳤다. 갑자기 소녀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왜 그랬어…?”

 

 

 

그 한마디를 들은 순간 눈이 번쩍 뜨였다. 깜빡 잠든 건가. 아니, 기절한 거였나?

 

아까 달리면서 다친 곳이 욱신거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친 건지 손이 살짝 스쳤을 뿐인데도 쓰라림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나왔다.

 

“이봐-. 어디 있어?”

 

소년 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를 찾고 있는 듯했다. 귀신의 목소리가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상자 뚜껑을 살짝 열고 밖을 살펴봤다. 손전등이 없으니 소년 귀신의 모습을 찾기 힘들었다. 상자 안에서 두리번거리던 나를 소년 귀신이 먼저 발견하고는 말을 걸었다.

 

“…숨는 건 빠르구나. 괜찮은 거야? 여기 가구들 부서지고 난리 났던데.”

“죽다 살았어…. 여기서 피안화 하나 찾은 뒤에 여자 귀신한테 쫓겼다고….”

 

소년 귀신이 말을 거는 걸 보니 여자 귀신은 간 것 같다. 그제야 나는 상자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내가 어둠 속에서 손전등을 켜지 않으니 소년 귀신이 이상하게 여겨 물어봤다.

 

“…손전등은? 안 켜?”

“분명 오늘 배터리를 새로 갈았는데 그 여자 귀신에게 쫓기는 도중 방전되었어.”

“…그렇다면 지금 새벽 2시쯤 된 건가. 앞으로 힘들어지겠는데.”

 

새벽 2시에서 새벽 4시. 귀신이 활발해지는 시간이자 한이 서린 귀신의 힘이 강해지는 시간. 설마 배터리가 방전된 건 그 여자 귀신이 한 건가.

 

들어오기 전 보름달은 내 머리 위에 있었다. 그렇다면 자정이었을 텐데, 체감상 네 시간은 더 된 것 같았는데, 지금까지 두 시간밖에 안 지났다는 건가. 초조함에 엄지손톱을 깨물었다.

 

밖에 비도 오는 데다가 새벽 2시가 되었다. 귀신이 힘은 강해질 때로 강해졌을 것이다. 3개를 찾는 데 두 시간이 걸렸다. 피안화는 아직 4개나 남았는데…. 더 강해진 여자 귀신을 상대로 지금까지의 시간 그 이상을 버텨야 한다. 지금 상황은 매우 절망적이었다.

 

일단 불을 밝힐 만한 것을 찾아야 한다. 이럴 줄 알았으면 손전등 하나 더 갖고 올걸…. 후회해도 이미 때는 늦었다. 수중에 불을 밝힐 게 없었기에 소년 귀신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 집안에는 손전등이라던가 랜턴이라던가 뭐 불을 밝힐 만한 거 없어?”

“…성냥이라면 하나 있어. 444번째 피해자의 유품. 아마 1층 주방 쪽에 있을 거야.”

 

444번째 피해자는 주방에서 죽은 건가. 유품이라니 조금 찝찝했지만 일단 살 사람은 살아야지. …잠깐만, 소년 귀신은 444번째 피해자라고 했다. 몇 번째 피해자가 어디에서 죽었고 유품으로 남긴 게 무엇인지까지 전부 기억한다고? 그의 말도 안 되는 기억력에 놀라서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네 기억력이 놀라워서.”

“…기억 못 하면 안 되지.”

 

나는 의문을 품은 채 되물었지만, 소년 귀신은 그 말을 끝으로 한동안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방전된 손전등을 버리고 소금물이 든 병을 쥐었다. 계단 쪽으로 가려다 바닥에 있던 물건을 밟고는 미끄러져서 엉덩방아를 찌었다. 어떻게든 내 힘으로 나가려고 했으나 힘들 것 같았다. 결국, 소년 귀신에게 길 안내를 부탁했다. 그는 조금 망설이는 듯했지만, 이내 따라오라고 한다.

 

소년 귀신의 안내에 따라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과 하나가 된 듯 찰싹 붙어서 내려갔다. 조금만 헛디뎌도 굴러떨어질 게 뻔했으니까. 느리더라도 안전하게 내려가는 게 제일이다.

 

간신히 1층에 도착했다. 내가 계단에 앉아 잠깐 숨을 돌릴 동안 소년 귀신은 빠르게 1층을 탐색하고 왔다. 이 층에는 여자 귀신이 없으며, 성냥은 식탁 위에 있다고 했다. 여자 귀신이 없는 동안 빨리 성냥을 챙기고 이동하자는 생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은 다락방과는 다르게 각종 가구가 벽 쪽에 많이 있었다. 벽 대신 크기가 제각각인 가구를 더듬어가야 했기에 속도가 조금 느려졌다. 내 모습을 잠시 바라보는 것 같았던 소년 귀신은 길을 알려주겠다며 먼저 가버렸다. 어두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앞쪽에서 이쪽으로 오라는 소년 귀신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소년 귀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코너를 돌아 거실에서 주방으로 들어가는 그 길목이었다. 짧은 거리에서 문고리가 2개 만져졌다. 작은 방이 2개 연달아 있는 듯했다. 그중 오른쪽에 있는 문틈으로 약하게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멀리서 봤다면 안 보였을 빛이었다.

 

무엇인가 싶어 문을 살짝 열고 안을 봤다. 불빛에 방안을 확인할 수 있었다. 방이 아니라 세탁실인 것 같았다. 그 한가운데에서 붉게 빛나는 물체가 보였다. 모양으로 봐선 피안화였다. 지금 꺾을지 잠시 고민했다. 일단 성냥을 확보하는 것이 먼저겠지.

 

밖으로 나와 소리가 안 들리도록 조용히 문을 닫았다. 문 두 개 중에 오른쪽 문. 위치를 기억하고는 소년 귀신의 목소리가 들리는 주방으로 향했다.

 

“…오는 게 늦어.”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식탁은 바로 옆이야.”

 

옆쪽으로 손을 뻗어 소년 귀신이 말한 식탁 위를 더듬거렸다. 식탁의 중앙 부분에서 네모난 무언가가 잡혔다. 성냥갑이었다. 안에는 성냥이 여러 개 들어있었다. 대충 세보니 8개…. 아니, 9개인가.

 

“유품을 함부로 사용해서 죄송합니다. 이 집에서 탈출하기 전까지만 잠시 사용할게요.”

 

나는 얼굴도 모를 444번째 피해자분께 사과한 뒤, 서둘러 성냥 한 개비를 꺼내 불을 붙였다.

 

성냥에 붙은 불은 매우 작았지만, 어두운 집안을 환히 밝혀주었다. 빛이라는 게 이렇게 반가운 건 처음이다. 빛으로 인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옆에 있는 소년 귀신에게 말을 걸었다.

 

“…있잖아. 아까 오면서 피안화 하나를 발견했거든?”

 

피안화를 발견했다는 말에도 소년 귀신은 어떠한 반응 없이 어느 한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 끝에는 주방 측면에 있는 네모난 창문이 있었다. 그는 놀란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무엇인가 있는 건가? 창문 가까이 다가가려던 그 순간이었다. 소년 귀신에게서 지금까지 들어본 적 없는 다급한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들린다.

 

“성냥불 끄고 식탁 아래 들어가서 수그려!!”

 

소년 귀신의 말에 반절 정도 탄 성냥을 얼른 끄고는 식탁 아래로 들어갔다. 대체 뭐를 본 것일까.

 

한번 밖을 보라는 듯 한참 동안 치지 않았던 번개가 집 밖을 하얗게 만든다. 그 순간에 식탁 아래로 창문을 살짝 보고는 심장마비로 죽을 뻔했다.

 

창문은 닫혀있었다. 그 밖에서, 얼굴과 두 손을 창문에 바짝 붙인 채, 입이 귀밑까지 찢어져 피를 흘리는 얼굴이 보였다. 여자 귀신이었다. 그녀는 광기에 찬 눈으로 집안을 쳐다보며 섬뜩하게 웃고 있었다.

 

 

“저 녀석…. 한동안 안 보이더니 바깥에 있었던 거야. 집 곳곳의 창문마다 배회하면서 집안을 살펴보고 있었어…!”